추사김정희세계화사업을 아시나요. > 기념사업회소개

본문 바로가기

 
기념사업회소개

추사김정희세계화사업을 아시나요.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7회 작성일 25-08-05 10:09

본문

"추사김정희세계화사업회를 아시나요"


추사김정희선생의 유업을......전 세계에 알리고자 합니다.


-----------------------------------------------------------------------------------------------------------

실학 정신을 예술로 승화시킨 대가!!

김정희

김원춘(金元春), 金正喜


출생: 1789년 06월 03일  

시기: 조선후기

사망: 1856년 10월 10일

대표작:〈세한도〉, 〈모질도〉, 〈부작란도〉, 〈추란도〉, 〈불이선란도〉, 《실사구시설》 등


김정희선생은 문화, 예술, 사상계 전반에 걸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필치가 호방하고 문기가 배어 있는 문인화의 특성을 잘 보여 준다.


그는 옹방강의 서체를 배우면서 조맹부, 소동파, 안진경 등의 서체를 배우고 익혔으며, 이를 바탕으로 독자적으로 서체를 연구한 끝에 만년에 추사체를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청나라에서 귀국한 후에도 옹방강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경학에 대해 논하며 자신의 견해를 발전시켰다.  


그는 금석학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31세 때는 우연히 승가사에 갔다가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하는 업적을 쌓았다.


 또한 《실사구시설》 같은 저술을 통해 실학에 대한 학문적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는 등 조선의 신학문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


김정희는 34세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세자시강원, 예문관검열, 성균관 대사성, 병조참판, 형조참판 등을 거치는 등 출세 가도를 달렸다. 


특히 효명세자가 대리청정하던 시절 아버지 김노경과 함께 세자의 측근으로 활동할 만큼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1840년에 제주도로 유배되면서 그의 인생에 암운이 끼기 시작했다. 


1830년, 김노경이 윤상도의 옥사를 배후 조종했다는 혐의로 고금도에 유배되었다가 순조의 배려로 풀려나 복직한 일이 있었는데,


 헌종 즉위 후 10년이나 지나 다시 이 일이 불거진 것이다.


9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나 용산 한강변에 집을 마련하고 살았으나 1851년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길에 올랐다.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이 철종의 증조인 경의군을 진종으로 추존하고 위패를 영녕전으로 옮길 때 헌종을 먼저 모시도록 주장해 파직된 일에 연루된 것이다. 


1년 후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안동 김씨가 정권을 쥐고 있던 때라 정계에 복귀하지 못했고,


 만년에는 아버지의 묘가 있는 경기도 과천에서 후학을 지도하고 글씨와 그림을 그리며 지냈다.


(사)추사김정희세계화사업회  김기숙올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추사김정희세계화사업회
추사김정희세계화사업회 │ 경기도 시흥시 복지로 103-1 (대야동), 3층
TEL : 031-311-5112, FAX : 031-311-1322 │ E-mail : kisook8860@hanmail.net
Copyright © 추사김정희세계화사업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