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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과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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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52회 작성일 24-12-24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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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초반


출생과 가계

충청도 예산현(현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병조판서를 지낸 김노경과 유준주의 딸 기계 유씨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노영의 양자가 되어 한성부로 상경하였다. 그의 가문은 멀기는 했으나 왕실의 이중 외척으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세력가였다.

 

당색으로는 노론으로 그의 집안은 서인 중진인 김홍욱의 후손이었다. 노론의 당원이 된 뒤에는 고조부 김흥경이 영조 때의 재상이었고,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서녀 화순옹주의 부마가 되어 월성위가 되었다. 또한 증조부 김한신과 10촌 형제간인 김한구의 딸은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였다.

 

그의 집안은 노론 외척 계열이었지만 고조부 김흥경과 증조부 김한신은 당파에 초연했고, 추사 역시 벽파나 탕평당에 들지 않고 북학파에 가담하였다. 7세 때 그는 입춘대길이라 쓴 글을 문앞에 붙여 놓으니 지나가던 채제공이 보고는 김정희에게 장차 명필이 되겠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서얼 출신으로 시, , 화에 모두 능했던 박제가에게 어려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박제가를 통해 북학파 박지원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영조의 딸 화순옹주가 출가한 월성위 집안에서 태어난 김정희의 집안에는 대대로 명필이 많았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기계 유씨가 임신한 지 24개월 만에 출산했다는 전설이 있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었다.


청소년기

그러다가 큰아버지 김노영이 귀양 가고, 둘째 큰아버지 김노성, 할머니, 할아버지 등이 죽게 되었다. 그러자 가문을 이어야 한다는 집안의 뜻에 따라 김노영의 양자로 입적된 뒤 15세의 나이로 동갑인 한산 이씨와 혼인한다. 결혼하던 그해 정조가 승하하고(1800), 그의 증대고모뻘인 김대비(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그 연고로 1년 후 1801, 그의 생부인 김노경은 종3품까지 벼슬이 오른다.

 

양어머니 남양홍씨를 통해 남연군과 이종사촌간이 된다. 이러한 인연으로 후에 흥선대원군이 김정희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게 된다. 생모가 34세로 세상을 떠나자, 비탄과 허무감에 고향 예산으로 내려가 한때 불교에 심취하기도 한다.

 

스무살 되던 해(1805) 대왕대비가 승하하고, 그 다음달에는 부인 한산 이씨가 죽었다. 이 무렵 스승 박제가가 유배에서 풀려났다가 집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양어머니도 얼마 뒤 죽었다. 양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른 뒤 한 살 아래인 규수와 재혼한다. 이듬해인 1809(순조 9)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여 생원이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생애 후반


유배 생활

그러다가 1840(헌종 6) 무렵 안동 김씨가 집권하자 이번에는 김정희 자신이 윤상도(尹尙度)의 옥()에 관련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1842년 음력 11월 부인이 세상을 떠났으며, 그 예순세 살인 1848년 음력 126일에 유배에서 풀려난다. 제주도에서 유배하던 때에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에까지 내려오는 한국의 서법을 연구하여 만든 서체가 추사체이다. 이 추사체는 한국의 필법뿐만 아니라 한국의 비문과 중국의 비문의 필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유배지에서의 곤궁한 생활 가운데 계속 글과 작품을 썼다. 그의 유배지에는 안동 김씨 세도가의 김유근 등이 찾아오기도 했다.

 

그의 대쪽 같은 성품은 그 뒤로 안동 김씨의 표적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친구 권돈인(權敦仁)이 의정부영의정으로 김정희를 돌봐 주었는데, 궁중의 제례와 관련하여 그가 실수를 하게 되었다(헌종묘천 문제). 1850(철종 1) 또는 1851년에 실수한 의정부영의정 권돈인은 물론이고 친구였던 김정희까지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출가와 집필생활

북청 유배는 1852년 예순여덟 살 겨울에야 풀려나게 되며, 그동안 지인과 제자로부터 고대의 석기를 모아오게 하여 한국의 고대 문화를 연구하였다고 한다. 12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친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서화와 선학(禪學)에만 몰두했다. 이 때는 안동김씨의 세도가문이라 서용의 명령은 내려졌으나 현직으로 복귀하지는 못했다.

 

북청에서 돌아온 김정희는 경기도 과천에 과지초당(瓜地草堂)이라는 거처를 마련하고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으며, 일흔한 살 되던 해에 승복을 입고 봉은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해 10월 과천으로 돌아와 생을 마쳤으며, 죽기 전날까지 집필을 하였다고 한다. 작품 중에는 후일 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와 모질도(耄耋圖), 부작란도(不作蘭圖) 등이 특히 유명하다. 문집으로 완당집, 완당척독 阮堂尺牘, 담연재시고 覃硏齋詩藁 등이 있고 1934년에 간행된 완당선생전집이 있다.

 

사후

서예가로 명성을 날렸고 사후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후 그의 사상과 학문이 재조명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북학파 사상에 대한 벽파 및 위정 척사파 계열의 반감으로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그의 사상과 학문에 대한 검토, 연구가 시작되었다. 1934년에 가서 그의 문집과 저서, 시문 등을 모은 완당선생전집이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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